- 가수 현철씨라면 현재 23년째 톱가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부산출신의 대스타. 하지만 그에게도 너무나 아픈 과거가 있어, 1968년 ‘무정한 그대’로 데뷔했으니 올해로 음악인생 43년째. 그런 그도 20여년간 무명의 작곡가와 가수로 지내. 이른바 대기만성형.
- 70~80년대 광복동 범일동 등에서 아세아레코드, 오아시스레코드사의 사무실 간판을 달고 생활을 영위해. 주위 선후배들이 양철과 나무판을 사서 사무실 간판을 만들어 걸어준 얘기는 지금도 부산연예계의 숨은 얘기로 전해져.
- 당시엔 무명가수는 끼니를 떼우기 어려웠던 게 다반사.
- 80년대 중반, 85년 초여름으로 기억해. 부산의 민영방송 라디오 2개 채널에서 ‘앉으나 서나 당신생각’이란 노래가 좀 과장하자면 하루에 20~30회씩, 전파를 타. 더욱이 언더그라 운드에서도, 다방에서도, 또 당시엔 디스코텍이 번성해 1,500명씩 들어가는 대형 디스코텍 에서 블루스타임으로 넣어. 한마디로 어디서나 동시다발로 터져나와.
- 다른 도시에서 보면 분명 놀라운 현상. 이런 현상에 대한 얘기는 다음에 언급하기로--.
- 당시 서울 출장가서 물어보니 서울사람 아무도 몰라, 한마디로 부산시민이 함께 나서서 히트시킨 곡. 지금이라면 어림없을 정도로 방송에서도 집중 밀어주기를 했던 것.
- 처음 듣고 3~4회 들으면 따라 할 정도로 쉽고 독특한 창법인데다. 자주 들으니 귀에 쏙 박혀들어 올 수밖에. 이 노래는 83년까지 부산사람들의 혼을 뺄 정도로 부산지역서만 히 트.
- 아시다시피 부산은 옛날부터 한국가요의 본산지로 불리는 곳. 일본 등 외국 대중예술, 특 히 가요의 수입 첫 입국 관문이자 시민들 또한 흥과 가락이 어느 지역민보다 강렬하고, 또 정열적.
-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떠오르는 당신 모습 피할 길 없어라∼’란 ‘앉으나 서나 당신생각’ 이란 곡이 그가 본격 인기가도에 오르도록 한 행운의 곡. 바로 부산시민이 도와준 힘.
- 현철 자신은 이 곡을 만들어 낸 것은 “무명가수 시절 정말 돈도 못 벌고 셋방살이로 전 전긍긍하며 아내를 너무 고생시켜서, 고민 끝에 가요계를 떠나려고 마지막 곡으로 아내에 게 바치는 노래를 만든 것”이라고 회상.
- 82년 후반부터, 서울서 88년까지 6년동안 준비한 ‘사랑은 나비인가 봐‘ ’못난 내청춘‘ ’청 춘을 돌려다오‘ ’사랑의 배신자‘ 등을 아시아레코드사에서 내놓았으나, 돈을 못벌어 서울 마장동, 작은 골방 예각의 삼각형 쪽방에서 생활하던 힘들던 시절이 있어.
- 70년대 말에, 국제신문 사회문화팀 기자로 서울서 같이 뛰었던 윤익삼선배(부산출신,‘추억 의 테헤란로’ 작사가)가 88년 여름께 제게 전화를 해와. 현철씨의 고향은 부산 강서명지, 이 선배가 같은 명지출신.
- “현철이가 서울 올라와서 마장동 골방에서 라면끓여 먹고, 머리맡 작은 선반 위에 백구두 올려놓고 생활하는데, 눈물이 날 정도다. 부산출신의 중견이 이렇게 지내면 우리 체면이 말이 아니다. 우리가 좀 도와줘야겠다”며 요청해.
- 당시 아시아레코드 전속이었는데, 회사서 얻어 준 방이 그것. 아시아레코드는 부산출신의 고 최치수씨(‘대전발 영시오십분’ 청춘을 돌려다오‘등의 작사가)가 경영하다가 작고하시자 사위되시는 분 운영할 때.
- 아마 회사 사정이 좀 어려운 것으로 판단. 또 현철이 부산서 고생할 때 최사장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관계로 회사서 해주는 대로 참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돼.
- 마침 계약만료가 다 되어감으로 필자가 직접 지구레코드사 임정수사장(작고)께 전화, 계약하게 도와줘. 그래도 못믿어워서, 당시 국내 가요계를 담당한 연예기자는 일간스포츠를 포함 한 12개 언론사 기자들 있었어. 이들의 영향력은 대단해. 필자와 같이 10여년을 뛰었던 분 들이라 지구레코드 들어갈 때, 사장님께 꼭 부탁해달라고 지원을 부탁한 기억.
- 그래서 지구레코드서 만든 첫 음반이 ‘내 마음 별과 같이’(박성훈작곡), ‘봉선화연정’, ‘백년 해로’ ‘싫다싫어’ ‘아차하다’ 등이 담긴 신보. 레코사의 비밀이라 정확히 밝힐 순 없으나 뒤 에 들은 얘긴데, 30만장 이상 팔리고, 지금까지도 일본 중국 미국 등으로 팔린다고.
- 이때부터 현철은 상승가도를 달리면서 ‘들국화 여인’ ‘사랑의 이름표’ ‘수선화’ ‘서쪽으로 간 여인’ 등 지금까지 모두 25곡의 연속 히트곡을 내놓아. 탄탄한 정상가도를 달리게 된 것. 그리고 이 25곡의 히트곡을 불러 이른바 ‘국민가수’로 지칭.
- 어느 정도로 그의 노래가 대중, 특히 전 연령층을 파고 들었나. ‘사랑의 이름표’는 초등학 생들까지 스스럼없이 따라 부를 정도. 대중가수의 인기란 오르락내리락, 또 반짝했다가 사라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는 25년 동안 흔들림 없이 국민적 인기를 유지하면서 ‘트로트계 황제’의 위치를 굳건히 지켜.
- 그가 여전히 인기를 끄는 비결은 뭘까. 어떤 이는 “토종 된장 같은 구수한 목소리”, “사투 리가 짙게 묻어나는 입담”, “민요풍이 가미된 독특한 꺾기 창법” 등을 들고 있는데, 저는 그의 두터운 인맥이 최고 비결이 아닌가 생각. 그것이 바로 그만이 가진 독특한 복. 그의 히트곡 다수를 만든 작곡가도 그와 함께 보컬 ‘현철과 벌떼’멤버였던 박성훈와 박현진씨.
- 지금도 인기를 계속 누리고 있는 ‘아미새’의 탄생만 해도 그래.
- 지난 4년여간 내리 최고 히트곡으로 랭크되고 있는 ‘아미새’에는 상당한 뒷얘기 있어, 누구나 노래를 들으면 “그런 새는 없다. 무슨 뜻이냐?” 물어.
- 그 노래제목은 원래 엉뚱한 곳에서 나온 것. 필자가 아미새를 탄생시킨 장본인 중 한사람.
- 필자와 부산의 유명 작사작곡가 겸 연주인 나영수선생, 이분은 80~90년대 부산의 유명카바레와 전국 대형 무도장에서 한때 선수금 1억원, 월 개런티 2천만원을 받던 스타연주인.
- 필자와 친분 있는 의학박사 한분, 황치일씨란 분의 농원이 경주 보문단지가 한눈에 보이는 북군동4길의 북군산 소금강지구 산기슭에 있어. 1만5천평의 농장엔 배나무 7백여그루(지금은 베어 내 없음)와 폭포, 연못, 울창한 삼림 등이 있는데, 나영수씨와 다른 연예인 의사 사업가 교수 언론인 등 다양한 부류의 친구와 가족들이 매주 이곳에 올라가 휴일을 보내 던 중,
- 필자가 휴식처인 이 농원의 노래가 필요하다며 농장주 황박사가 만든 가사와 곡을 제공해 줄것을 제의, 이분은 의과대학에 가기 전, 가정형편상 교육대학을 가서 의무교사 근무기간 인 2년을 마친 뒤에 다시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을 들어가서 공부한 특이한 경력을 가지신 분이라 피아노연주는 물론 쉬운 노래는 직접 작사작곡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
- 이분의 노래가사론 대중적 멜로디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 우리는 다시 수정을 제의. 그리고 나영수씨가 작곡을 하게 된 것인데, 이게 엉뚱한 가사의 노래가 된 것.
- 이 농장 이름이 ‘아미새’였음. 농장주 황박사는 공주 3명 있어, 아삼(아침 朝의 고어), 미리 (룡龍의 순 우리말), 새삼(새로운 新 삶)의 예쁜 한글 이름 한자씩을 따와 만든 순 한글식 신조어.
- 아미새(朝龍新)는 원래 다음과 같은 가사.
1. 음지의 눈~발이 다 녹기 전에 / 양지에서- 소옥 내민 노루-귀 모습 / 혜미와 단둘이서
노-래하며 / 보문호를 거닐면서 사랑을 배웠지 / 아미새~아미새~아미새~아미새~ / 뻐꾸 기가 울어 울어 토함산이 춤을 춘다 / 해가 질수록 달이 질수록 비밀스런 아-미-새.
2. 이화의 꽃망울이 터지기 전에 / 진달래 붉은 꽂잎 허들어 질 때 / 혜미와 단 둘이서 노- 래 하며 / 보문호를 거닐면서 사랑을 배웠지 / 아미새~아미새~아미새~아미새~ / 북군동 이 울렁울렁 농원에서 춤을 춘다 / 해가 질수록 달이 질수록 사랑스런 아-미-새
- 그후 우리는 이 노래를 본격적으로 히트가요로 한번 만들어보자는데 합의, 나영수선생을 통해서 가수 현철이 노래를 부르게 하고, 현철은 너무 대중적이지 않은 노랫말이라고 여겨서 다른 작사가와 나영수씨에게 수정을 의뢰, 개작을 한 것이 지금의 가사.
- 농원주 황박사는 지금도 노래가 나올 때마다, “아버지로서 우리 공주들을 생각해 볼 때, 노랫말 의미가 기왕이면 ‘아름답고 미쁜(믿읍다) 새로’ 풀이되었으면 좋겠다”고 섭섭한 의중을 비치고 있어.
- 반면 이 노래를 부른 현철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때론 꼬집고 싶고 또 얄미울 때도 있다. 아름답고 얄밉기도 한 사랑, 바 로 그 뜻이 담긴 ‘아름답고 미운 새’를 말한다. 감정이 흠뻑 담긴 가사에 흥겨운 가락의 국악창법을 접목시켰더니 대박이 터졌다. 주부들이 설거지하다가도 ‘아미새’ 노래가 나오 면 TV 앞으로 달려나온다”
- 아직까지 인연이 안되어선지, 경주의 명승지 ‘아미새농원’ 주인 황박사와 가수 현철은 만나지 못했고, 이 명승지를 현철은 보지 못해.
- 그의 특이한 창법, 속칭 ‘꺽기창법’이라고 하는 창법은 누구도 흉내를 낼 수 없다. 일본의 어떤 학자는 그의 목소리를 연구한다고. ‘도레미’ 중 높은 ‘미’에서 꺾어지는 창법인데, 민요가락 중 ‘닐리리야 닐리리야 아~ 니나노 ∼’라고 할 때, 끝에 음이 올라가는 식의 창법을 응용하는 것.
- 이 ‘꺽기창법’이 한때 가수 현철의 앞길을 막는 장애물.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하고 배고프 게 해.
- 현철은 부산에서 처음엔 솔로로 활동하다가, 1974년 앞서 언급했던 김양화씨의 권유로 ‘현철과 벌떼’를 결성, 팝송을 리메이크하며 열심히 불렀지만 왜색조라는 이유로 주목을 받지 못해. 팝송 리메이크곡 ‘무정한 그대’와 ‘미스터몽키’, ‘다함께 춤을’ 등이 그 예.
- 이때 그는 13번이나 이사를 했는데, 주로 월세 1만∼2만원짜라 단칸방에서 생활해. 친구집 에 세들어 살면서 봉지쌀 사다 먹고 연탄 낱장으로 사다가 추위 달랜 일화는 유명.
- 그가 본격적으로 방송을 타게 된 건 1987년 리비아 대수로공사 현장 공연 전, 근로자들이 고국의 아내가 그리우니,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을 부른 가수를 공연단에 꼭 포함시켜 달라고 요청해 KBS측이 주현미 현숙 조용필 김연자 김세환 백남봉 나미 등 당시 유명 인 기 스타들에다 현철을 합류시켜.
- 이때 주위에선 얼굴이 안 알려진 현철을 리비아로 가는 근로자로 알아. 이를 계기로 대스 타로 부상해. 그뒤 현철은 보란듯이 가요대상 등을 휩쓸어. 1989년 KBS가요대상 받고 무 명시절의 설움이 한꺼번에 북받쳐 시상식에서 ‘사나이의 눈물’을 쏟아내 전국 시청자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해.
- 70년대와 80년대엔 부산에는 가요계의 대인물 많아. 우선 부산출신이나, 부산을 기반으로 해서 최고 스타반열에 오른 가수는 현철 외에 나훈아, 조용필, 설운도, 김수희, 문주란 하수영, 정훈희, 남상규, 진송남, 최갑석 등 20여명이나 돼.
- 작사계의 거물로는 야인초(한많은 대동강, 99년 작고), 최치수(89년 작고), 김양화(사랑은 나비인가봐) 이 분은 부산가요계에 한 획을 그을 정도의 많은 족적을 남긴 방송PD인데 다음에 한번 소개하기로. 그리고 앞서의 윤익삼씨, 또 천봉(앵두나무처녀, 짝사랑), 홍기표 (그 사람이 보고 싶다)씨 등이 있었고,
- 작곡가론 김세레나가 부른 ‘성주풀이’와 ‘숙대머리’등을 작곡한 김종유(‘08년 자고)씨, ‘하숙 생’ ‘진고개신사’의 김호길씨(‘05년 작고), 최익봉(MBC전속악단장, 남진이 부른 ’언약‘ ’청춘 은 갔네‘), 박성문, 차경철, 조용필이 부른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와 진로소주의 CM송을 작곡한 허영철씨(’98년 작고), 윤홍중, 나영수씨, 양병철씨, 박성훈(사랑은 나비인 가봐), 박현진씨(봉선화 연정), 배신영(날잊지말아요, 이향림노래) 등이 있어.
<현철 프로필>
- 본명 강상수 / 64년 동성고 졸 / 66년 동아대경영학과 중퇴 / 68년 데뷔곡 ‘무정한 그대’ 발표 / 74년 록밴드 ‘현철과 벌떼들’ 결성 / 88년 KBS가요대상, MBC10대가수상 수상 /
89년 일간스포츠 골든디스크상 / 90년 KBS가요대상, MBC10대가수상, 고복수가요제 대상, 제1회 서울가요대상 7대 가수상 / 97년 국무총리표창(선행 연예인) / 99년 제36회 저축의 날 국민포장, KBS 올해의 가수상 / ‘02년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특별공로상(대통령 표창) / ’06년 목관문화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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